[기고]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잃어버린 이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잃어버린 이름

[원문보기  ‘충남노동권익센터’ 기고글 입니다]

https://www.notion.so/16e0f0e4c52c4362a2512ec585dd1ecf

새움터 최진일 대표

한익스프레스 참사 이후 노동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산재유가족들, 세월호참사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은 올해에는 기필코 이 법을 제정하겠다는 의지를 모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이미 2013년 이후 수차례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OECD산재사망률 1위라는 오명은 이제 듣기조차 지겨운 이야기가 되었고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형편없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이 나라 시민들의 상식이 되었는데도 이 법은 무엇에 가로막혀 제정되지 못하고 있을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원래 이름은 ‘기업살인법’이었다. ‘기업이 사람을 죽인다’며 누군가 선동을 위해 만들어낸 것 같은 이 자극적인 이름은 의외로 국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시행 중인 법안 명칭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영국의 ‘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해석하자면 ‘기업의 과실치사와 기업의 살인에 관한 법’이 그것이다. 법안에 이렇게 자극적인 이름이 붙은 것은 우리와 영국의 언어문화적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이야말로 ‘기업이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도발적인 문제의식을 던지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명확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산재사망은 기업의 살인일 수 있다’는 명제를 사회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산재사망10만인률 0.53*이다. 이것은 단순히 처벌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산재사망이 줄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국의 낮은 산재사망률은 기업살인법만으로 이룩된 성과가 아니다. 기업살인법은 오히려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여타의 구체적인 조치들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안전보건조치를 위반한 기업에게 상한없는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법령, 중대재해에 대한 처벌에 있어 하한형을 두고, 구체적인 양형기준을 만들어 산재사건에 대한 봐주기판결을 방지한 조치, 감독관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작업중지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 등이 그것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일부 시민사회 안에서조차 ‘기업살인법’이라는 단어가 너무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라며 고개를 저었고, 법률가들은 우리나라의 법체계상 기업에 살인죄를 묻는 것이 법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고상하게 외면했다. 법은 그 사회의 지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회의 인식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제정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재벌과 경총의 노골적인 반대만이 아니라 여전히 산재사망을 불행한 사고로, 노동자의 실수로만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의 바탕에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제한함으로서 사고원인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고용노동부의 고질적인 행태, 사고를 일으킨 기업에 대해 산업안전보건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실무자들의 구체적 행위에만 집중해 과실치사상 등의 형법을 위주로 처벌하는 사법부의 관행과 한계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사망사고를 일으킨 기업의 안전보건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동일한 제철소에서, 조선소에서 똑같은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된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의 사업주들은 어떻게 해서든 법망을 피해나가려 할 것이고 결국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법의 제정을 통해 우리가 산재사망은 기업에 의한 살인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체적인 조치들을 더욱 촘촘히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영국의 사례에서 언급했던 다양한 조치들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세부내용으로 반영될 수도 있고, 산업안전보건법, 고용노동부 규정 등 다양한 부분에서의 개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아울러 산재예방에서 노동자들의 참여권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조치들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운동은 단순히 그 법안 하나만을 국회에서 통과시키자는 운동 이상의 과제를 품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을 계기로 고민과 행동의 폭을 더욱 넓혀가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도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함께 대응하고 연대하자.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를 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