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훈구 동지 추모제 영상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훈구 동지 추모제 영상

[추모사 1] 김재광 동지가 고 이훈구 동지에게 

훈구 형에게

– 1주기에 보내는 편지

형. 1년이 되었어. “벌써 인지, 이제 서야 인지” 세월을 가늠하기가 어렵네. 사실 요즘에는 세월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뭐가 맞는지 틀린 건지 잘 모르겠어.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명해질지 알았는데 더 잘 모르겠고, 판단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많아 지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예전에 잘 모르면서 했던 말이나 글이 생각날 때면 민망하기도 해. 형도 그랬을 라나?

형은 설렁탕 먹고, 난 2,000원 인가 더 비싼 도가니탕 먹고, 근처 주차장에서 헤어지면서 “잘 지내, 다음에 보자”고 서로 인사를 했는데, 그 다음 만남은 형이 다시는 퇴원하지 못할 병원이었어. 빌어먹을 놈의 명의는 남은 생이 2년이라더니, 정말 2년이더라고 

난 형이 가고 나서, 이틀에 한 번씩은 형이 생각이 나더라고.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 꼭 막 슬프고, 엄청 보고 싶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냥, 정말 그냥 생각이나, 어떤 때는 목소리, 또 어떤 때는 얼굴, 그리고 몸짓..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자니. 새삼 보고 싶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형은 어떤 사람이고 싶었을까? 이제 그건 우리 기억의 몫이 되었어. 형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 비슷하면서도 각자 저 마다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기억의 조합으로 형은 하나의 이훈구이기도 하고, 여럿의 이훈구이기도 할 거야. 그 중에는 형이 되고자 했던 이훈구가 있을 거고, 개중에는 형이 마뜩치 않은 이훈구가 있을지 몰라. 그렇지만 모두 이훈구야. 수백 수천의 이훈구. 딱히 하나로 정의하기보다는 수백 수천의 기억 모두가 형이라 생각하고 싶어. 기억이 그 사람이니까. 나도 내가 기억하는 형이 있어. 결국에는 따뜻했던 형. 

세상은 우리가 함께했던 그때처럼 뒤숭숭해. 우리는 항상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지. 비슷하지만 똑같은 세월은 없으니까. 형이 좋아했던 문구와도 같이 여조삭비(如鳥數飛)외에는 답이 없어. 형이 그렇게 노력했던 것처럼. 

모란공원 열사 묘역에는 형이 아는 분이 참 많잖아. 그러니까 적적하지 않겠다 싶어. 형이 얼마나 이바구를 좋아해. 형 바람이 나하고 나중에 장소팔/고춘자처럼 만담 전국일주 하자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야. 이제는 그럴 수 없으니 전국에서 모인 여기 동지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대신하시길 바래요. 아이구님. 

이제 만담전국일주는 같이 할 수 없어. 그러나 형의 또 다른 바람처럼 나는 잘 살게. 잘 살아낼게. 해볼게 

편히쉬어 

2021.09.04

형의 동지, 동생, 친구 재광   

        

[추모사 2] 정경희 동지가 고 이훈구 동지에게 

보고 싶은 아이구 동지 

아이구동지가 떠난 후 지난 1년간/ 변함없이 계절은 바뀌고/자본의 억지 부림과 탄압은/되풀이 되고/이에 맞서는 투쟁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일상에서/활동을 하다가/아이구 동지와 함께 의논하거나/위로받고 싶은 순간에/음성을 들을 수도/얼굴을 볼 수도 없는 현실은/남겨진 저희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변화입니다. 

아이구 동지와 함께 한 추억이 있어/그리움도 더한 것이겠지요/ 가까운 추억을 하나 떠올리자면/지난해/아이구 동지 구술작업 초기/코로나19로 거의 실내생활을 하셔야 했을 때/봄맛을 만끽해드리고 싶어/음식을 준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진달래 화전과 전복쑥국을 맛있게 드시다/불쑥 ‘이 쑥 어디서 캤어/농약 뿌린 논둑에서 캔 거 아냐/고 의심의 질문을 던지셨지만/그릇은 다 비우셨죠./올 봄/쑥 캤던 산을 오르며/피어있는 진달래를 보면서/아이구 동지 생각이 간절하더이다.

 향남 공감센터는 코로나로 녹록치 않지만/순항 중입니다./더없이 반가운 일은/7월부터 조이동지가 합류하면서/활동 역량과 범위가 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5층을 임대하여 교육실과 직원휴게실 및 탕비실 공감을 확보하였고/동료에 기반한 동의의사결정 운영방식을 채택하여/구성원이 함께/결정하고 책임지는 새로운 조직체계로의 전환기에 있습니다. 

아이구 동지가 계셨더라면/‘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우리 몸에 맞는 형식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어떤 걸 하더라도 중요한 게 무엇인지만 놓치지 않고 가면 되지/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쉽지 않은 길이지만/‘너무 속 끓이지 말고/걔는 왜 그런다니?/라며 하실 위로를 생각하며/힘든 시간 잘 견뎌 보겠습니다. 

앞뒤 재지 않고/옳은 것이면 적들과 맞서 싸우고/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진했던 실천가/동지의 그릇된 점은/나무라기보다 질문을 통해/스스로 깨닫게 이끌고/힘든 시간을 함께하며 안부를 살피고 동지를 소중히 여겼던 활동가/ 아이구 동지의 삶을 닮도록 노력하겠습니다/자본이 곳곳에 쳐 놓은/배부름과 안락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고/자유롭고 주체적인 자아로 성찰하는/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추모사 3] 이종란 동지가 아이구 동지에게 

훈구 동지 

하늘에서 잘 계시는지요? 

아직도 훈구동지가 우리와 이 세상과 

작별을 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비석 앞에서 

추모사를 읽게 만드실 줄 정말 몰랐어요

솔직히 아직도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볼 것 같고, 

여기 그냥 있으신 것 같은데 말이죠.

훈구동지는 대학 이후 새롭게 만났던 운동권 선배였던 것 같습니다.

반올림 운동을 한노보연이 함께 이끌면서

훈구동지가 여러 중요한 리드를 했었던 것 같아요.

2007년 시작한 삼성 백혈병 대책위의 앞날을 전망하면서

장기싸움을 할 수 있도록 ‘반올림’으로 거듭나도록 만들고,

예리한 감각으로 정세와 상황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섬세하고 구체적인 투쟁의 전략을 짜고 

손재주 좋게 피켓도 만들고

삼성 공장과, 본사, 반도체 전시관과, 근로복지공단과 수원역 앞 거리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집회와 선전전을 함께했던, 

그런 훈구 동지의 모습이 너무도 너무도 그립습니다.

그렇게 주춧돌을 놓아주신 덕에  

반올림은 여전히 그 운동의 길에 있습니다. 

운동은   

구체적으로 해야한다

흥이나게 해야한다

멀리보고 가야한다

훈구동지의 소중한 조언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한때는 일년 넘게 한솥밥을 먹던 가족이었잖아요 

맛있는 반찬 많이 해주시고 저녁이면 반주한잔 즐기던 훈구동지의 

여유로웠던 모습, 엄마같던 모습도 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날들이었네요

정말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주시고  

반올림 운동의 길을 열어주신 훈구동지,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보고싶습니다 

나중에 언젠가 저 세상에 술한잔 할 수 있겠지요

그때까지 잘 계시길 바래요~ 사랑합니다~

[추모사 4] 최진일 동지가 고 이훈구 동지에게 

이훈구 동지 1주기 추도사

 거지발싸개. 1주기를 준비하면서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지발싸개 같은 놈으로 살고 싶다’는 동지의 소망을 곱씹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8년 전에는 그 거지가 나였겠구나…하고 말입니다. 최근에 알게 된 것입니다만 당시에 훈구동지가 서산지역에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애정을 쏟으셔서 연구소 동지들이 질투를 할 정도였다는데 정말 그런가요? 

종종 훈구동지를 처음 만나고 함께했던 그 시절을 되돌려보곤 합니다. 저를 비롯해 서산의 동지들이 훈구 동지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며 부산하게도 꼼지락거렸던 그 시절들을. 마치 어린 시절의 일기를 꺼내보다 잊고 지냈던 꿈을 발견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아보곤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전망을 논할 깜냥은 없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 시절의 저는 그저 두 팔 뻗어 닿을 수 있는 사람들 정도만 챙기고 살려했고, 그저 내 눈 앞의 불한당들과 싸우면서 살면 그뿐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치 앞도 못 보는 저에게 훈구동지는 무려 3년짜리 ‘노동자건강권쟁취활동 기획안’을 들이 밀었었지요. 그걸 또 좋다고 신나서 함께했던 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뭐에 취해있었는지는 몰라도 어느덧 그 계획은 지금의 새움터가 되어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훈구동지와 의기투합했던 것은 동지가 그리는 더 나은 노동과 삶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도 아니고 그런 세상을 향해 가는 동지의 전망이 기막히게 밝아 보여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동지의 깊고 넓은 성찰, 그 속에서 ‘노동자가 자기 삶의 주인장’이 되어야 한다는 흔들림 없는 원칙을 부여잡고 제시하는 대안과 희망에 반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네, 복잡하게 말 돌려봐야 뭐하겠습니까. 훈구동지한테 반했던 거지요. 

그런 동지가 곁에 없는 것이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무언가 고민에 빠질 때면 ‘훈구동지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동지가 곁에 없어서 제가 놓치고, 잘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늘 걱정합니다. 그나마 지난 1년간 나아진 거라면 이제는 기분 좋은 순간에도 동지를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는 정도일까요. 동지가 그토록 강조하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주체들, 현장혁신의 주체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그런 순간들에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동지처럼 치열하면서도 넉넉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동지처럼 사람을 어느 한구석 빼놓지 않고 통째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함께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동지처럼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만큼의 깊이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동지처럼 당신의 삶 자체로 그 언어를 증명할 방법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도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더 먹으면 조금 알 수 있을까요? 벌써 ‘나이만 꽁으로 먹어봐야 다 헛방’이라며 ‘제대로 하라’며 타박하는 동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많이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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